내 인생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가족들이 내 책임의 범위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가족이란 자아의 반물질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일 것이다. 물론 지금의 자아는 그때와는 다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견딜만 하다. 그리고 현재의 그들은 너무 약한 존재라서 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나의 다른 어떤 측면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아의 재구성이 완전히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오에 겐자부로처럼, 이들로부터 도망치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늙고 아픈 어머니와 아직 혼자는 놔둘 수 없는 아기를 데리고 마치 백화점처럼 붐비는 종합병원 복도를 서성거리는 일에 익숙해지는 순간은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아이 손을 붙잡은 채로 무성의하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간호사선생이 엄마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나는 현실과 그 너머를 무수히 오간다.
어제밤 진보통합당 중앙위원회 자리에서 소위 당권파들이 심지어 당내 인사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뉴스를 본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자들. 이렇게 표현하는 것조차 과하다. 괴물과 싸운다는 이유로 자신을 정당화해온 괴물들.
- 그들에 대해 떠오르는 소회는 많지만.....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그러나 정치를 '이기고 지는 게임'으로만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이런 때가 아니면 또 언제 말을 남기랴. 좋은 정치는 제도와 시스템 뿐만 아니라 그 주체가 진보하는 정치일 것이다. 정치 뿐 아니라 무엇이든 '좋은 것'은 그것에 참여한 사람들을 성장시킨다. 주체가 소모되고 변질되는, 당신들이 해온 그것은, 당신들이 게임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들의 괴물같은 모습 때문에 좋은 정치가 아니다.
- '비판적 지지'라는 달콤한 유혹에 다시는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자신의 무논리성을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계속 정당화하는 세력과 역사가 주는 교훈을 보며 차마 그럴 수 없는 세력이 분리될 뿐이지 않을까. 아픈 부분은, 이런 기회주의적 다툼 속에서 고립되고 반복해서 데미지를 입어 온 후자의 세력이 너무나 미약하다는 것이다.
- '당신들'의 외연이 너무나 넓은 시절이다. MB를 이기기 위해 모든 부글거리는 것들을 못본 체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발언을 두둔하고, 성적 대상화와 패권주의를 용인한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새로운 괴물들이 또 다시 자라나고 있음을 목격해야 하는 슬픈 시절이다. 그러나 뭐 이런 시절이 처음 온 것도 아니고. 좌절은 나의 힘.
긴 하루를 마치고 마을버스에서 내린 길, 가로등 빛을 머금고 서 있는 나뭇잎들이 싱그러운 냄새를 풍긴다. 너무나 내 마음에 드는 풍경이다. 고즈넉하지만 다정한 길목, 부드러운 불빛, 살랑대는 밤바람과 그 속에 담긴 풀 냄새, 나무 냄새. 갑작스레, 이렇게 좋은 곳을 떠나 다른 집을 구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자문했다. 방이 부족하니까. 아기를 더 낳으면 더 좁아 지니까. 지극히 평범한 답변을 나열하고보니 무언가 허전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놔두고 조금 더 넓은 집, 값이 더 떨어지지 않을 집, 사람들이 더 많이 찾을 집을 골라 가려 하는 중이라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의 만족보다 어느 새 이 세상살이의 방식에 더 많이 다가섰다는 뜻일 것이다. 결혼이라는 장치 속에 한발 들어서면서부터 내 삶은 그 궤도위에 올라 서 있음을 잘 안다.
나는 좀 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꺼려했던 캐릭터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고, 내가 회피했던 종류의 정체감 - 아기 엄마, 주부, 동네 아줌마 - 을 받아들이고 또 동류들과도 제법 잘 교류한다. 요즘 이 엄마, 주부, 아줌마 커뮤니티에서는 아이들이 당한 사고에 대한 소식이 많았다. 아이들이 당한 불의의 사고나 갑작스런 피해에 그 아이 엄마의 마음이 쉽게 감정이입이 되어 버리는 사람들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순간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기도하고, 응원하며 나는 내 평범성과 더 친밀해져 가고 있다.


